일상

로체인, ‘좋음’을 지향하는 팀

By 2015년 4월 29일 No Comments

그저께 이런 메일을 받았습니다. ‘함께가고자하는 방향과 추구하는 목적이 무엇이냐’는 물음이었습니다. 정신이 아득해졌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을 모두 설명하자니 너무 구차하기도하고, 사실 팀 전체가 그것을 이해하고 있는지도 의문입니다. 단지 저 혼자 가지고 있는 생각일 뿐이고 이것이 구체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목표를 보여드릴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저는 고심 끝에 아래와 같은 답변을 했습니다.

소셜벤처를 지향합니다. 법으로 정의하는 사회적 기업은 아니지만 사회적 가치를 중시합니다.
문화를 만들어 사회를 설계하고 싶습니다. 그것을 꿈의 실현으로 봅니다. (컬쳐/소셜 디자인을 통한 드림 디자인)
애플같이 완벽한 제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또 벌어들인 돈보다 우리가 걸어온 길을 통해 존경받는 회사가 되고 싶습니다.
SAS사, 제니퍼 소프트 같은 회사를 꿈꿉니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산다고 생각합니다. 행복한 회사였으면 좋겠습니다.
회사에서 놀 수도 있고, 또 그것 때문에 고용불안을 느끼지 않는 회사였으면 좋겠습니다.
지위고하가 없습니다. 구글처럼 자유롭게 프로젝트를 결정하고 자유의지로 참가하길 바랍니다.
참견쟁이, 수다쟁이들의 회사이길 바랍니다. 빠르고 효율적인 의사결정보다 팀원의 의사가 충분히 반영되는 회사였으면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저 목표를 달 성할 수 있을지 없을지 여부를 떠나서)이것은 저의 생각일 뿐입니다. 로체인의 다른 팀원들이 원하는 팀의 모습은 어떤 것일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하나의 조직이 한 사람의 생각과 비전으로 움직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같은 생각을 가질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되겠죠. 그러나 최소한 하나의 조직이 한 방향성을 가질 필요는 있습니다. 한 방향성이 없다면 그것은 조직이 아니라 시너지를 기대할 수 없는 각 개인의 합에 불과할테니 말입니다.  조직이란 혼자 할 수 없는 일을 같이 수행하는 개인들의 모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분명히 각 개인의 합과는 다른 의미죠.

저는 로체인이라는 조직의 방향성을 저렇게 화려하고 구체적인 목표들 보다 단순히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좋음’을 지향하는 팀. 이 ‘좋음’에 대한 지향을 가지되 팀원 개개인이 자신의 목표와 신념과 비전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일에서든 포기할 수 없는 자신의 신념과 비전을 가지길 바랍니다(P.s 1). 단 신념과 비전을 아집과 고집으로 착각해서는 안되겠지만 말입니다(P.s 2).

로체인의 방향성을 ‘좋음’을 지향하는 팀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이렇게되면 ‘좋음’을 무엇으로 정의하느냐라는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사실 ‘좋음’이란 선입니다. 좋음(good)이란 동서양을 불문하고 선과 같은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느낌이 듭니다. 일반적으로 좋음은 내가 처한 상태를 주관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선이란 표현은 내 판단기준보다 사회적인 합의가 앞서있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길에 쓰레기를 버리는 것이 되겠죠. 쓰레기를 길에 버리면 자신은 편한, 좋은 상태가 됩니다. 쓰레기통을 찾아 쓰레기를 버릴 때까지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죠. 그러나 선이라는 개념에서 본다면 선하지 않은 행위입니다.

다시 좋음에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좋음과 선이 다른 개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개인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이 상반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 인생을 바꿔놓았던 질문 중 하나는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 용납될 수 있는가?’입니다. 개인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이 상반될 수 있는 가장 극적인 케이스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희생은 분명히 ‘좋은’ 상태가 아닙니다. 그러나 다수를 위한다는 명분은 충분히 ‘선’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질문에 진지하게 생각해보기 전까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의 신봉자였기 때문에 당연히 제 스스로의 희생이 가능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 상황에서 스스로를 희생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답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또한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희생이 될 수도 있거니와 명백히 소수의 희생이 다수에게 큰 행복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당연시 여겨지는 사회가 과연 건강한 사회인가라는 의문이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로체인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만들어지지 않는 팀이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좋음’과 ‘선’을 일치시켜 나가는 팀이었으면 합니다. 사회를 위해서 우리 팀이, 혹은 팀원이 희생해야한다고 말한다면 저는 단언컨데 NO라고 대답할 겁니다. 혹시 팀원이 자의적으로 자신을 희생하겠다고 말하면 우선 말릴겁니다. 그러나 그 희생이 행복하다고 말하다면 누구보다 안타까워하면서도 등을 떠밀겁니다. 또한 팀을 위해 팀원 누군가가 희생해야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결단코 NO입니다. 하지만 ‘좋음’이라는 개념은 결코 선을 배제한 개념이 아닙니다. 일치시켜 나가야하는 개념이죠. 사실 궁극적으로 행복해 지려면 자신만 행복해선 불가능합니다. 내 부모님도 내 친구도 내 나라도 이 세상도 행복해야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요? 내 눈앞에 굶어 죽는 아이들이 있는데 배불리 먹으며 행복할 수 있을까요? 또 개인의 욕망을 채우기 급급한 팀을 ‘좋은 팀’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주 어렵게 어렵게 돌아온 느낌이 듭니다. 저는 로체인 팀원 개개인이 이 ‘좋음’이라는 테두리 안에만 있다면 어떤 생각을 가지든, 무엇을 시도하든 응원할겁니다. 그러나 언제나 ‘좋음’이라는 상태를 지향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행복한 나’가 되길 바라고 더 나아가 ‘좋은 팀’이 되길 바라고 더 ‘좋은 나라’, 더 ‘좋은 사회’가 되길 바라고, 더 ‘좋은 세상’이 되길 바라는 사람들이 모였으면 좋겠습니다(P.s 3).

P.s

1. 항상 팀원의 의견을 존중한다라고 이야기하지만 제 케릭터는 ‘민주적인 독재자’라고 생각합니다. 의견을 듣고 다수결은 존중하지만 다수결을 따르지는 않습니다. 민주주의는 최악을 막을 수 있지만 최선을 가져올 수 없는 정치형태이고, 가장 이상적인 정치형태는 한 명의 철인(완벽한 철학자라고 정의합니다만 그냥 완벽한 사람으로 이해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철인 자체가 이상적이죠.)에 의한 철인정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한 명의 철인이 나오기 어렵고 나온다 하더라도 그 철인이 다수의 이해를 받기는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또 현대 사회는 최선보다 최악을 막는 것이 중요한 사회이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수가 다수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소수가 보호받지 못하고 있지 않나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다수결을 따르지 않는 것 일겁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의견을 무시하고 다수결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독재자는 없었죠. 그래서 저는 민주적인 독재자가 아니라 그냥 독재자일지도…)

2. 신념과 비전을 아집이나 고집과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생각은 물론이고 신념이나 비전이 언제나 맞고 옳은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틀린 부분도 있고 맞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틀린 부분에도 불구하고, 맞지 않는 부분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은 알지만 나는 이렇게 해야겠다.’ 라는 것이죠. 그래야 틀린 부분, 맞지 않은 부분을 수정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전체적인 방향성이 조금 틀린 부분이나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흔들리는 것은 경계해야 할겁니다. 제 스스로의 신념은 ‘모든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믿고, 언제나 그 방법을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입니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신념은 ‘가장 합리적이지만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결정을 내리기 쉽고 ‘합리적이지만 뛰어나지 않은’ 결정을 내리기 쉽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만 결코 포기할 수 없네요. 이런게 신념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3. 슈테판 클라인의 [이타주의자가 지배한다]는 제가 꿈꾸는 로체인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조금만 양보(희생)하면 더 큰 행복(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사실 간단한 이야기지만 이걸 인문학이 아니라 통계학이나 뇌과학등 자연과학적 근거를 제시하기떄문에 명저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평균적으로 3%의 희생을 하며 산다고 합니다. 그럼 6%의 희생을 한다면 두 배 더 행복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 6%의 희생이 개인의 삶을 포기할 만큼 큰 희생이라는 생각은 안듭니다. 6%보다 더 크게 돌려받을 것이고요. 다만 평균이라는 점이 문제죠. 사실 30%쯤 희생하고 사시는 분들은 0%인 분들의 9명 분까지 하고 계시는 거니까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슈테판 클라인이라는 저자는 인문학적인 내용을 과학적으로 절묘하게 풀어내는 저자라고 생각합니다. 대표 저서는 아마도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행복의 공식]입니다. 이 역시도 행복이라는 추상적이고 인문학적인 개념을 자연과학적으로 풉니다. 한편, 이타주의자가 ‘지배’한다는 제목은 조금 불편하군요. 원제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4. 사실 오늘 네이버 메인에 사이먼 시넥의 골든 서클이야기가 보였습니다. 아직도 ‘왜 로체인을 하는가?’라는 질문과 쩐알람이라는 리워드 앱을 만들고 있다는 괴리를 좁히지 못하고 있기때문에 이런 포스트를 작성하게 된게 아닐까 싶습니다. 근사한 핑계거리를 찾자!

5. 하늘에서 필력이 뚝하고 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하고싶은 이야기는 많은데 이걸 구체적으로 장황하게 쓸 자신도, 필력도 없습니다. 이건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여서 하나하나 논하다보면 이야기가 산으로 가기 때문에… 오늘도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언젠가 다 전달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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